익명톡방에서 살할만한 오실로스코프를 여쭤보신 분이 있어 간단하게 답변드린 적이 있는데, 정리할 겸 글로 남겨둡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서 저는 코딩쟁이이지 하드웨어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현업에 계신 분이 보기에는 수준이 많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0. 용도
오실로는 전기 신호의 파형을 측정하는 장비입니다. 멀티미터가 특정 순간의 전압을 알려준다면, 오실로는 그 변화를 그래프로 기록해 줍니다.
대개 자작차 판에서는 e포뮬러 기준으로 TSAL, BSPD 등 전자 회로로 특정 로직을 구현해야 하는 경우에 종종 필요해집니다. 그 외에는 초기충전 전압을 찍어본 적이 있긴 하네요.
0-1. 진짜 사야 할까? 진짜로?
일단 오실로는 세팅하기가 아주 귀찮습니다. 장비를 가져다 기판의 적절한 위치에 프로브를 연결하고 (여기서부터 핀을 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전압/시간 스케일과 트리거 등을 세팅하고 나서야 파형을 볼 수 있습니다.
몇 번 써보고 나면 ‘진짜 오실로까지 꺼내야 할까?’ 를 3번 정도 스스로에게 되묻고도 답이 없을 때에나 오실로를 쓰게 됩니다. 가격에 비해 생각보다 활용도가 많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학교에는 전자과 전공기초 실험실에 오실로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아는 교수님이나 과 사무실에 잘 비비면 한두번 가져다 쓴다거나, 방학동안 잠시 빌리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아니면 몰래 가져다 쓰고 감쪽같이 돌려놓는다거나
다만 학교에 있는 장비들은 상태가 좋지 않거나 화면이 CRT인 아날로그 오실로를 아직도 쓰는 경우도 많아서, 학교 오실로가 못 써줄 수준이라면 구매를 고려해볼만 합니다.
1. 구매
오실로를 구매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성능의 오실로가 필요한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e포 대회를 나가는데 출력이 300kW나 되는 모터는 필요가 없는 것처럼, 불필요하게 성능이 좋은 오실로를 구매하면 쓰기만 번거로워집니다.
1-1. 성능
오실로의 성능지표는 크게 3개를 보면 됩니다. 대역폭, 샘플링 레이트, 메모리 뎁스입니다.
대역폭
대역폭은 이 오실로가 어느 주파수의 신호까지 “통과시킬” 수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측정하려는 신호보다 대역폭이 부족한 오실로를 사용하면, 이미 오실로에 들어갈 때부터 신호가 망가진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대역폭이 부족하면 샘플링 레이트가 높아봤자 이미 뭉개진 신호를 아주 정밀하게 측정할 뿐입니다.
오실로의 대역폭은 측정하려는 신호의 최고 주파수보다 최소 5배 이상이어야 합니다. 100 MHz의 신호를 측정하려면 대역폭이 500 MHz는 되는 오실로를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즘은 성능 인플레가 심해서 대부분 아무리 싸구려도 50 MHz 정도는 됩니다. 뻥스펙을 고려해도 5 MHz 이하의 신호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뜻이고, 자작차에서는 이걸로도 차고 넘칩니다.
샘플링 레이트
샘플링 레이트는 전압 변화를 측정하는 시간 간격입니다. 샘플링 레이트가 1 GSa/s 라면 1초에 1G 개의 샘플을 측정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샘플링을 빠르게 해야 그 시간 동안 변화한 신호를 정확히 잡아낼 수 있습니다. 측정하려는 신호 주파수의 최소 2배 이상이어야 합니다.
다만 2배는 이론적인 최소값이고, 5배 정도는 되어야 정확하게 신호를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오실로 대역폭의 2~3배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메모리 뎁스
샘플링을 많이 하면 그만큼 더 많은 양의 데이터가 쌓입니다. 메모리 뎁스는 한 번 측정에서 기록할 수 있는 샘플의 개수입니다. 대개 1 Mpts 와 같이 표시하고, 백만 개의 샘플을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측정해야 하는 신호가 0.5초 길이인데, 메모리 뎁스가 최대 샘플링 레이트로는 0.1초만 기록할 수 있다고 하면 뒤의 0.4초는 잘리게 되는 겁니다.
1-2. 기능
채널 수
기능이라고 말하기 뭐하지만 오실로에 프로브를 몇 개까지 꽂을 수 있는지입니다. 대개 2채널 또는 4채널로 나옵니다. 2채널이면 99.5%의 케이스에 충분하지만, 혹시 언젠가…? 하는 생각에 다들 4채널을 사곤 합니다.
터치스크린
개인적으로 오실로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구성요소입니다. 버튼과 노브만 가지고 조작하는 것과, 터치가 되는 것은 사용성에서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터치가 안 되는 오실로는 사는게 아니라는게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신호 디코딩
UART, I2C, SPI 등 디지털 통신 신호선에 물리면 무슨 데이터가 지나갔는지 프로토콜을 까주는 기능입니다. 임베디드 장비 가지고 놀 때는 아주 유용하지만, 자작차판에서는 필요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게와 배터리
크게 내장 배터리로 작동하는 충전식, 외장 보조배터리로 작동이 가능한 방식, 콘센트를 연결해야 하는 방식 정도가 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전기를 많이 먹는다는 의미이므로 오실로 자체의 부피와 무게도 증가합니다. 프로브 연결하기도 귀찮은데, 220V 콘센트 찾아서 꽂고 5kg짜리 오실로 들고올 생각을 하면 화부터 납니다. RF 신호를 분석할 초고성능 오실로가 필요한게 아니라면 크기와 무게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1-3. 제조사
오실로 제조사는 크게 메이저, 마이너, 듣보잡 정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
- 텍트로닉스
- 키사이트
- 로데슈바르즈
- 텔레다인
- 플루크
한국에서는 대개 앞의 3개 회사 제품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키사이트도 꽤 보였는데, 요즘은 텍트로닉스가 제일 잘 나가는 것 같네요.
하나같이 아주 짱짱한 성능과 사악한 가격대를 자랑합니다.
마이너
- 리골
- 시질런트
- 한텍
이 레벨에는 이들 말고도 수없이 많은 제조사가 있습니다. 리골은 거의 준 메이저로 쳐도 될 정도이고, 훌륭한 가성비 균형을 자랑합니다. 나머지는 안 써봐서 잘 모르겠네요.
듣보잡
- FNIRSI
알리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핸디 오실로들 전부를 포함합니다. 다만 이 중에서도 FNIRSI 는 좀 봐줄만 한데요, 거의 매년 신제품도 하나씩 나오고 이 아랫바닥에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 유튜버들 리뷰를 보면 약간의 뻥스펙은 있지만, 가성비가 엄청나고 매년 조금씩 개선도 됩니다.
2. 모델
제가 사용해본 것들 중에 괜찮았던 모델들만 가격대별로 가져와 봤습니다.
10만 원 이하
FNIRSI 2C53T
멀티미터, 함수발생기가 같이 들어있는 3-in-1 오실로입니다. 생긴것도 멀티미터처럼 생겼습니다.
주로 멀티미터로 사용하다가 어쩌다 핸디 오실로가 필요할 때 사용할 만합니다.
터치는 안 됩니다만, 핸디라는 점을 고려하면 버튼 개수는 좀 있어서 아예 못써줄 정도는 아닙니다.
대역폭은 50 MHz이고, 10 MHz 짜리인 2C23T 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알리에서 평소에 60달러 정도에 팔리고, 저는 할인할 때 2개 14만원에 구매했습니다.
같은 제조사의 DSO-TC3/4 시리즈를 포함해서 이것보다 더 싼 모델들은 사지 마세요. 돈버립니다.
10만 원 ~ 30만 원
여전히 이 가격대에서는 FNIRSI 말고는 선택지가 전무합니다. 얘네가 신기한 거지 원래 오실로라는게 이 가격대에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FNIRSI 1013D
배터리 충전식 태블릿형 오실로입니다. 7인치 터치스크린이 꽤 쓸만합니다. 대역폭은 100 MHz 이고, 할인할 때면 13만원 정도에 구할 수 있습니다.
취미용이나 자작차 정도 수준에는 이정도 성능이면 솔직히 충분합니다.
크게 투자하고 싶지 않다면 일단 이거 써보다가 부족하면 당근에 팔아치우고 업그레이드하면 됩니다.
단점은 물리 버튼이나 노브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축 스케일 바꿀 때는 노브가 편한데 없으면 생각납니다. 비슷한 가격에 터치스크린 크기를 4.3인치로 약간 (많이) 포기하고 노브를 추가하면 FNIRSI 2D15P 로 가면 됩니다.
관세 면제 범위인 150달러 이하에서 구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FNIRSI DPOS350P 는 200달러 정도에 1013D 와 같은 7인치 터치스크린이고 대역폭이 350 MHz 입니다.
이 가격대뿐 아니라 더 상위 가격대에서도 구할 수 없는 대역폭이지만, 어느 정도의 뻥스펙도 고려해야 합니다. 노브도 없고 관세도 내야 해서 별로 추천하진 않습니다.
30만 원 ~ 100만 원
이 가격대는 전부 리골입니다. 가성비가 훌륭하면서도 꽤 신뢰할만한 성능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주변에 쓰는 곳도 많이 봤고, 한국 공식 총판이 있어 전화로 여쭤보면 잘 알려주십니다. 구매 이벤트 같은 것도 종종 하고, 3년 보증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RIGOL DHO800 Series
리골은 학회같은 곳에서 기업 전시 부스도 많이 하는데, 가면 명함 추첨으로 1등한테 이거 뿌립니다. 물론 당첨될 생각은 버리는게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벤치탑 형태이지만 1.8키로 정도로 아직 들고는 다닐만한 수준입니다. 물론 보조배터리를 챙기면 2.5키로가 되겠지만요.
7인치 터치스크린, 충분히 많은 노브, 시리얼 디코딩 기능 다 들어있고 USB C타입 PD 전원으로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전용 어댑터 필요 없이 60W 이상 공급 가능한 USB C타입 충전기나 보조배터리만 있으면 켜집니다.
대역폭은 80X가 70 MHz, 81X가 100 MHz 입니다. 900 Series로 가면 색깔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90X가 125 MHz, 92X가 250 MHz로 대역폭이 올라갑니다. 그거 말고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주목할 만한 점은 DHO802부터 DHO924까지 사실은 내부 하드웨어가 동일하고, 성능은 모두 소프트웨어로 제한된다는 점입니다. 해외 포럼에 가면 소프트웨어 락을 해제하는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패트리온에서 성능 언락 및 UI 커스텀 펌웨어를 몇만 원 수준에 판매하는 사람도 있는데다, 공식 펌웨어보다 10배는 자주 업데이트됩니다.
물론 정품을 구매하는게 바람직하겠으나, 알리에서 할인 영끌하면 관세 포함 30만원 후반에 구할 수 있는 804에서 100만원이 훌쩍 넘는 924 성능이 나온다는 점은 생각해볼만 합니다.
100만원 ~ 1000만 원
이 가격대의 오실로는 저도 많이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가장 메이저한 가격대이지만 오히려 접할 기회가 별로 없더라고요. 정품 가격의 리골 DHO900 Series 와 텍트로닉스의 2 Series MSO 가 괜찮아 보였는데, 앞의 물건들을 보다가 보면 이 가격에 이 대역폭이라고?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1000만원 이상
제가 사용해본 모델은 텍트로닉스의 5 Series MSO인 MSO54B와 키사이트의 6000 X-Series MSOX6004A 입니다. 이 가격대에서는 이미 성능과 기능과 사용성이 우리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습니다. 어차피 사비로는 살 일이 없는 가격대이니 무엇을 골라도 무방합니다.
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텍트로닉스의 5 Series MSO는 디지털 신호 디코딩을 하려면 DLC처럼 추가 패키지를 구매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만 구매하면 되는게 아니라 UART, I2C, SPI 한묶음이 수십만 원이고 CAN, LIN 등 자동차 패키지가 또 수십만 원, MIL-STD-1553B, AFDX 등 항공/군사용 프로토콜이 또 수십만 원입니다. 내 돈 주고 살 일이 없을 때나 선택 가능한 옵션입니다.
